[쓸 수 있는 밤] 1. 케이블카 안에서 나를 소개하기
아래 내용은 글쓰기모임 <쓸 수 있는 밤>에서 '케이블카 안에서 나를 소개하기' 를 주제로 적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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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복이 예쁘네요. 고글 덕분에 얼굴을 볼 수 없으니 궁금하면서도 어쩐지 안심이 돼요.
곤돌라 타는거 좋아하세요? 저는 마음에 들어요. 새하얀 설원에 일제히 곡선을 그리며 내려가는게. 그 궤적이 얽히는걸 멍하니 보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요. 여러번 타다보면 눈에 익는 사람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구요. 전에도 비슷한걸 보면서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이 있어요.
한번은 밤에 비행기를 탔어요. 비행기가 이륙하고 육지와 점점 멀어지는데 저 멀리 꽉꽉 막힌 도로가 눈에 들어왔어요. 까만 도로에 노랗고 빨간 행렬들. 저는 그때 운전을 못해서 빨간게 뒤고 노란게 앞이였던가, 그런 생각보다도 근사하다는 느낌을 가졌던 것 같아요. 나도 자주 초조한 채로 저 불빛의 역할을 했을텐데. 저걸 이 멀리서 마주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저는 그때 노트에 그 행렬을 그렸어요. 길고 완만하게 포물선을 그려놓았고, 여행이 끝나고 돌아와서 그 세 줄 사이에 빨갛고 노란 색연필로 점을 찍었어요. 어쩌면 그 점들 중 어떤 점으로, 우리가 만났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아,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시는군요.... 맞아요 지하철은 막힐 리는 없죠.
근데 저희 집 주변엔 지하철이 없어요. 제가 이곳에 이사오기 전부터 지하철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완공날짜를 차일피일 미루는거있죠. 제가 김포에 처음 갔을 땐 2018년 여름 완공이였는데, 이번해 겨울을 거쳐 이듬해 여름으로 또 늦춰졌어요. 아마 전 공사로 인한 불편함만 겪다가 지하철의 수혜는 못 받고 나오겠네요.
김포공항이 강서구인거 아셨어요? 저는 모르고 이사갔어요. 우리집도 김포니까 공항이랑 가깝겠지, 생각했죠. 근데 진짜 김포에서 공항까지는 버스로 한시간이 걸려요. 올림픽대로나 강변북로는 자주 막히고요. 그래서 아마 저는 저 도로 위에 자주, 오래 있었을거에요.
그래도 전 그 시간들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김포에는 2층버스가 있거든요. 운이 좋으면 2층버스 맨 앞자리를 전세낸 듯 타고 갈 수가 있어요. 내내 높은 곳에서 풍경을 내려다보다가 차가 막히기 시작하면 좋아하는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그러다 고개를 들었는데 간판이나 하늘, 풀 따위가 정겨워보이면 사진을 찍기도 하구요. 집이 먼게 꼭 나쁘지만은 않죠?
어디 사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계속 저만 떠드니까 민망한데 그쪽 얘기를 들을 수 없어 아쉬워요. 사실 전 시시콜콜한 얘기를 실컷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당신이 지루할까 걱정되거든요.
저는 취향을 공유하는 것에 기쁨을 느껴요. 쉴 새 없이 내뱉는 문장들에서 이미 눈치 채셨나요? 어쩌다 비슷한 취향의 사람을 만나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구요, 그래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하죠.
취향이라 할 만큼 정해진것, 나다운것이 희미한 사람이지만 그 조각들을 야금야금 모아가는게 즐거워요. 그래서 아마 저는 아주 오랫동안 부유하는 사람일 것 같네요.
이제 곧 도착하겠어요. 하나의 점으로 선을 꼬리로 달고 신나게 내달리다 보면 또 곤돌라에 타야 하
겠죠. 우리의 궤적이 얽히게 될까요. 저 언덕을 내려가는동안 제 이야기가 다시금 떠오르게 된다면, 다음에 당신 얘기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그때는 제가 귀 기울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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