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혐오스런 정의 2년

※ 제목은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참고했음
※ 누가뭐래도 이 글은 (자가반성과 과장이 담긴)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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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느지막한 오후에 일어나 오야코동을 꺼냈다. 지난달 일본여행에서 사온 3분요리. 그녀 인생에서 딱 한번의 해외여행이었다. 그 마저도 욕심과 게으름에 쫓겨 전전긍긍한 마음으로 흘러간 날이 절반이었다. 밥에 오야코동을 부어 랩을 씌우고 그대로 전자레인지에 올렸다. 좁은 방에 앉은뱅이 상을 펴고 숟가락을 놓자 조리가 끝났다. 심심하고 보람없는 간편한 끼니였다. 정은 그 무성의한 뜨거움을 입에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 죽고싶다’ 
속으로 읖조렸다. 흔한 말이다. 누구나 실천할 생각은 없지만 막막하거나 괴로울 때 마다 용기 난 사람처럼 거는 주문이었다. 실제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긴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들도 단지 모두의 바쁜 일상 중 어느날 저녁, 퍼런 뉴스배경의 오른쪽 귀퉁이에 잠깐 등장했다 기억속으로 사라졌겠지.
  정은 덮밥소스와 밥을 적절히 숟가락에 담아 부지런히 입으로 옮겼다. 정이 부지런한 순간은 이럴 때 뿐이었다. 졸업 후 애매하고 그럴 듯한 일들을 들먹이며 취업과 어른이 되는 일을 차일피일 미뤄온 2년. 그녀는 근 1년째 부모에게 같은 말을 되뇌이며 염치없는 손을 벌려, 뻔한 결심과 심심한 실패의 반복적인 생활을 지내고 있었다. 어디 가서 정은 취준생이 되기도, 프리랜서가 되기도, 뭔가를 찾아 방황하는 뜨거운 청춘이 되기도 하며 악의 없는 난감한 질문을 관리비 고지서를 지나치듯 넘기곤 했다. 그녀는 수없는 자신과의 약속에 실패하는 본인과 친해지지 못한 채 기약없는 하루하루를 아무 일 없이 보내고 있었다.
  정은 별 생각 없이 움직이던 숟가락을 멈췄다. 덮밥소스는 끝났는데 바닥에 밥이 애매하게 남았다. 새 밥이라고 할 수는 없게 덮밥찌꺼기가 듬성듬성 묻었고, 먹기에는 아무 간도 없이 밍밍한 밥. 애매하게 남겨져 골치 아픈 초라한 밥. 정은 문득 그 밥이 자신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아마 모든 한심한 것에 자신을 가져다 붙일 심상이었다. 간밤의 일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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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어젯밤, 병을 만났다. 병과 정은 대학 때 꽤 친했던 연년배 동기로, 한 때는 매일 밤 붙어다니며 으레 그럴싸한 철학이나 사회에 대한 주제를 꼽아 밤새 이야기 했다. 정은 그 누구와도 할 수 없는 속에 있던 묵직하고 멋져 보이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기뻤다. 책을 보거나 논문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나면 늘 어떤 주제를 가슴에 품고 병의 집으로 찾아가 소중한 이야기 보따리를 조심스레 풀었다. 공감과 잇다르는 흥미로운 주제들에 작은 소속감을 느꼈다그의 생각을 담고 싶어했고 또 그렇게 닮고 싶었다.
졸업 후 병은 취업했다. 정은 대학과 먼 곳으로 거처를 옮겼고 둘은 서서히 멀어졌다. 별다른 사건없이 자연스레 멀어지는 산뜻한 이별이 남모르게 진행됐다. 그 후 간간히 대소사를 공유하며 짧고 굵은 통화로 인연을 효율적으로 이어갔다. 그렇게 2년이 흘러 둘이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 그간 병은 다양한 사회경험과 스트레스를 얻었고, 정은 무기력과 취업에 대한 피해의식을 얻었다. 그들은 삼청동 끝자락의 어느 술집에서 반가운 만남을 가졌다. 정은 그간 핸드폰 너머로 병에게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럴듯한 조언과 취향, 잘 포장된 일상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하며 효율적인 연락을 잘 넘겨왔다. 물론 그날 저녁에도 그 모습을 내비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허술한 포장지는 두시간도 채 채우지 못하고 알코올 몇 잔에 찢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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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 눈을 번쩍 떴다. 여기가 어딘지 가늠하기도 전에 끔찍한 기억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과부하에 걸려 꿈쩍 않던 컴퓨터가 간신히 돌아와 명령을 후다닥 행하듯이, 어제의 기억들이 머릿속 화면에 현란하게 띄워졌다. 정은 소스라치게 놀라 주변을 주섬주섬 살폈다. 구겨진 셔츠 주머니 위로 말라붙은 토사물이 보였다. 간밤의 수치와 숙취에 입안이 바짝 타 들어갔다. 정은 낯선 이불을 어정쩡하게 덮고 한참을 괴로워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이불을 퍽퍽 차거나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끔찍한 수 십분이었다. 반투명한 거실문 사이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듯하고 성실한 실루엣이 일렁였다. 실루엣은 어둠의 그림자처럼 점점 가까워지더니, 무거운 드르륵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일어났네.

병은 그날 아침, 정에게 적당하고 차분한 너그러움을 보였다. 불안한 정에게는 거리감을 느끼기 충분한 태도였다. 욕을 하거나 '니가 어제-' 와 같은 말은 꺼내지 않았다. 호탕한 웃음이나 '다음부턴-' 과 같은 말도 역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 식의 애매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를 온통 메웠다. 눈으로 보이거나 맡아지지는 않았지만, 정은 그 기류를 그 어떤 커다란 형체보다 더 무겁게 체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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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술집의 뜨끈한 정종은 정을 취하게 만들기에 적합했다. 정은 금새 흥에 취해 여러잔을 연거푸 마셨고, ‘내가 취업을 못하는게 아니라로 시작하는 얘기, ‘나 좋다는 남자 사실 많은데 내가..’로 이어지는 얘기를 못난이 인형에 덕지덕지 삼색 매직을 칠하듯 그려내 술냄새에 섞어 뱉어냈다.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택시에 올라탔고 성산대교 한복판을 쌩쌩 달리는 택시안에서 분출하듯 토했다. 택시아저씨의 욕짓거리를 들었고 갓길에서 연신 죄송하다며 뒷자리를 닦는 병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를 중얼중얼 반복하며 토사물이 뭍은 손으로 그의 어깨와 옷자락을 잡았다. 흐릿하게 본인을 향해 소리치는 병의 모습과 온 얼굴과 몸에 오물을 가득 묻히고 멀찍이 병과 떨어져 걷던 그 어두운 새벽을 기억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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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집을 나서기 전, 병이 정을 불러 세워 무언가를 건넸다. 만나기 훨씬 전부터 얘기하던 선물이었다.

- , ..?
- . 별건아냐.
- 맞다맞다 깜박했네. 되게 궁금했는데 드디어 받는다, 진짜 고마워!

정은 약간 크게 제스쳐를 취했다. 자신의 내면을 병이 읽었을까, 곁눈질로 병의 표정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병은 의례적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둘은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병으로부터 돌아서면서 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불쾌하게 뜨뜻하고 끈적이는 이별의 순간이였다.
  정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부터 자괴감에 빠졌다. 성인이 되고 수년이 지났는데도 술에 잠겨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자신에게 너무도 화가 났고, 자연스레 길고 짧고 크고 작은 한심함들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질려버렸다. 서로를 특별히 생각했던 몇 년 전과 그와 연관된 모든 지인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2년만의 재회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을 자신이 다 망쳐 버린 것만 같았다. 그 날 밤의 일로 본인은 다시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볼 수 없는 의 세계로, 병은 희미한 웃음소리만 담장너머로 들려오는 의 세계로 분류된 것만 같았다. 그녀의 자책은 별다른 성과없이 자신을 자꾸 낭떠러지 쪽으로 밀어낼 뿐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여태 모여 흩어질 생각을 안하고 이제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남은 밥알처럼 뭉개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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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 남은 밥을 치우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정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초라한 자신을 더 한심하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그때 침대 옆에 기대져 있는 가방 사이로 병의 선물이 히끗하게 보였다. 정은 누운채로 오래전 쌓였을 포장지를 뜯었다. 책과 함께 들어있던 카드가 배 위로 툭 떨어졌다. 카드에는 약간의 애정어림과 존중, 등 토닥여주는 말들이 섞여있었다. 모두, 그 밤 이전의 병의 마음들이었다. 초록색 책의 제목은 정의 목울대를 울컥이게 만들었다.

『웃음이 예쁘고 마음이 근사한 사람』

그녀는 그에게, 아니 무의미한 2년을 차곡차곡 쌓으며 스스로에게, 이미 다르고 닳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에게 이제 병은 다시는 보고싶지 않은 사람이자, 보고 싶은 지난 날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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